
얼마전 BBC 인터넷판에 ‘행복맨’이라는 사람이 소개된 적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 서섹스에서 활약한 행복맨은 망토를 걸치고 눈 주위를 가린 채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는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현찰을 주기도 했다. 때로는 부담 없이 ‘커피 한잔 사 줄까요?’라고 묻기도 했고, 또 시계 상점 유리창 앞에서 내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에게 시계를 사 주기도 했다. 그는 무형의 선물도 하는데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그의 기이한 행동을 눈여겨보던 사람에게 행복맨은 “나는 단지 행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 일을 합니다.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때 그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게 즐겁습니다”라며 기행의 보람을 설명했다.
행복맨은 또한 자신의 배후에 ‘대단히 부유하며, 마음이 매우 너그러운’ 후원자가 있다고 했다. 그는 후원자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행복맨처럼 누구나 나눔과 베푸는 삶이 자신만을 위하는 삶보다 풍부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세상과 힘 겨루기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베푸는 일도 힘겨운 일이다. 마음은 있지만 언제나 문제는 실천이다.
어려운 시절 보낸 덕에 누구보다 그들의 마음 잘 헤아려
“미약하나마 시작이 중요한 게 봉사입니다. 지금은 3만 명의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지만 젊은 날 처음 봉사활동을 했을 때 저 또한 작은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배를 곯고 있는 옆집 아이에게 밥 한 그릇, 김치 한 보시기를 내미는 손길이 더 큰 봉사의 시작입니다.”
개인적인 삶을 뒤로한 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섰던 사단법인 새생명복지회 장길자 회장의 첫 말이었다. 30여년 봉사의 한평생을 살아온 장 회장의 말은 너무 거창하고 너무 크게 시작하려면 영원히 어려운 것이 봉사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저 또한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압니다. 그들을 보면 ‘이만큼 배가 고프고, 이만큼 아프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려움을 알고 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요즘도 끓인 찌개가 유달리 맛이 있으면 나눠줄 사람부터 먼저 찾는다는 장 회장.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는 자신의 개인 사정은 뒤로하고 달려갔던 덕에 장 회장의 봉사는 입소문이 많이 났다. 어둡고 소외된 곳에 그이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 그의 부지런한 사랑 실천은 어느덧 국가에서도 알아주었다. 지난 8월 국가에서 주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것. 장 회장은 또한 같은 달 한국신문방송인클럽에서 수여하는 ‘한국사회공헌(복지)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크든 작든 상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 상은 훈장을 받기까지 함께 수고해 준 새생명복지회 회원들의 몫입니다.”
겸연쩍은 듯 수상 소감을 밝힌 그이는 그러나 함께해준 새생명복지회 회원들에 대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맹호장을 받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던 2003 대구유니버시아드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해 개최됐던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는 대구지하철 참사로 인해 자칫 장례식장에 차려진 잔칫집이 될 수 있었다. 새생명복지회는 민간단체로 최장기간인 55일 동안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며 슬픔을 달랬다.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다가왔을 즈음에는 9만 명이 참가한 ‘오라 서포터스’를 구성해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심 어린 환대로 세계를 놀라게 한 ‘오라 서포터스’
‘오라 서포터스’는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들을 위해 유니버시아드대회 개막식에서 카드섹션과 더불어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174개국의 젊은이들이 모인 곳에는 ‘오라 서포터스’가 있었다. 진심을 다하는 그들의 응원과 환대에 세계에서 모인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정 많고 따뜻한 한국’이 각인되었다. 그 봉사의 중심에 장 회장이 있었다.
“자화자찬 같지만 우리 회원들을 보면 천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자태도 곱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운지 모릅니다. 지난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는 그 마음을 보여준 좋은 기회였던 거죠. 대구를 찾은 모든 선수와 관계자들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따뜻했다고 하더군요. 회원들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된 것 같습니다.”
입국장에서부터 마음으로 우러난 환대에 감격한 선수들의 뇌리에 가장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세계 스포츠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카드섹션이었다. 그 절정이 개회식에서 ‘오라 서포터스’가 선보인 카드섹션 ‘WE ♥ U’였다. 대구유니버시아드 내내 캐치프레이즈처럼 돼버린 ‘WE ♥ U’. 얼마 전 선교를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찾았던 한 목사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WE ♥ U’로 인사를 건네는 현지인을 만났다고 한다.
‘오라 서포터스’가 보여준 카드섹션은 사실 실제로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 자료 화면을 통해 본 카드섹션은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 정교하고 화려했다.
장 회장은 대학생들로 구성된 ‘오라 서포터스’ 회원들의 마음이 아직도 전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준비기간이 짧아 2주간 합숙훈련을 했어요. 저희 회원들이 그들 뒷바라지에 나섰는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들의 식성이었어요. 젊다 보니 식성이 대단했어요. 넉넉하게 준비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장 회장과 회원들은 하루에 땀 흘리는 서포터스들을 위해 하루에 8백 마리의 삼계탕을 삶고, 3천 개의 도시락을 싸서 날랐다. 장 회장과 회원들의 열성적인 후원에 서포터스들은 신명나는 응원으로 보답했다. 당시 중국 기자들은 ‘오라 서포터스’의 활약상을 보고 2008년 개최 예정인 북경올림픽 때 모범적인 자원봉사로 귀감을 삼겠다며 취재해 갔다.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아온 장 회장은 세계에서 날아온 선수들 중 가난하고 힘없는 곳에서 온 선수들에게 유독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빈곤 국가에서 온 선수들은 유니폼조차 갖추지 못했다. 장 회장은 지금도 유니폼을 건넸을 때 그들이 보인 뜨거운 연대의 눈물을 기억한다.
대회 기간 내내 함께했던 장 회장은 폐막식을 앞두고는 174개국 선수 임원들을 불러 만찬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는 ‘원더풀 코리아’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처음 ‘오라 서포터스’를 구성하며 품었던 장 회장의 ‘평화와 화합을 이루겠다’는 뜻이 이루어진 것.
“사랑과 베품은 비록 보상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 보답을 한다고 믿습니다. 진실된 마음이 전달될 때 그 힘은 나중에 10배, 100배 더 큰 보답으로 뿌린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지요. 물질적 보답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랑을 받는 사람보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베푸는 순간 이미 마음이 여유롭고 평온해집니다.”
모든 부조리의 근원은 욕심, 나누는 사람이 부자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한번의 봉사로 장 회장의 봉사를 평가할 수는 없다. 어쩌면 수상의 이면에는 보여지는 ‘봉사’보다 보이지 않는 ‘봉사의 마음’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다하는 날까지 봉사의 삶을 살겠다는 장 회장.
“세상살이는 자신이 느끼기에 달려 있습니다. 몇천억 원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한다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월셋방에 살아도 베풀 줄 알면 부자입니다.”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에게 삶의 태도에 대해 조언도 아끼지 않았던 장 회장은 얼마 전 그 말을 입증해 주는 한 사람을 만났다. 언젠가 장 회장에게 도움을 받았던 분이 찾아와 그에게 일어난 일을 전했다.
월셋방에서 생활하는 그에게 하루는 부자인 친구가 찾아와 풀죽은 목소리로 아내가 아프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아내의 병은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온 집안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정신이 없다고 했다.
돈 걱정 없이 지내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친구는 그에게 ‘아픈 사람 하나 없이 가정에 웃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전했다. 친구는 이어 그에게 ‘자원봉사까지 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라고 전했다. 그 순간 그는 행복의 기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부조리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측은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거든요. 봄으로써 믿고 들음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일수록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더 많습니다. 내가 먼저 본이 된다는 행각을 가져야죠.”
도움 받은 사람들이 다시 베푸는 대열에 합류
눈을 돌려보면 도움이 필요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결손 가정의 아이들, 무의탁 노인, 지체장애자들, 희귀병이나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등, 이들이 있어 자신의 삶이 행복하고 풍요하다는 장 회장은 이번 추석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빛이 강하면 어둠도 짙은 법이다. 가족의 웃음소리가가 클 때, 그렇지 못한 불우한 이들의 신음소리 또한 깊다. 장 회장은 웃음소리보다 그들의 울음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지체장애자들이 모여 있는 ‘소망의 집’을 찾아 생필품과 후원금을 전달했다.
돈이나 기계로 할 수 있는 봉사보다는 김치를 담그고, 독거노인을 목욕시키고, 설거지를 하는 등 몸으로 하는 봉사만을 고집하는 장 회장, 그이의 도움을 받은 이들은 이외에도 한두 명이 아니다.
성남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음의 목전에 이르렀다 장 회장의 도움으로 다시 삶을 찾은 노부부. 그 중 할머니는 죽고 할아버지만 남은 지금까지 장 회장의 도움이 이어지고 있다. 아흔이 된 할아버지는 장 회장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른다며 장 회장은 향기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이 땅에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참뜻을 전하기 위해 복지회 이름을 새생명복지회로 지었습니다.”
장 회장은 얼마 전 회원들에게 서운한 적이 있었다. 태풍 피해지역으로 봉사활동을 떠나며 힘든 데 쉬라며 그이를 데려가지 않았던 것.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건강관리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해맑게 웃던 장 회장.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살라는 그녀의 당부가 가슴에 와 닿는다.
Lang 한국Date2004-11-01ReportQueen